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안 이씨 (문단 편집) ==== 긍정 의견 ==== 원정시 농서 이씨 황족을 1명 파견한 게 아닌가. 단순한 장교가 제후의 직위를 받는가. 회남왕 이무가 맞는다는 전제하에 [[측천무후]]가 이무의 부친 [[이원례]]를 죽여 [[당나라]]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을까. [[http://www.ldc.co.kr/|#]] [[문무왕]]이 공을 인정해 시염성(鼓鹽城)에 식읍을 내렸고, 이에 후손들은 본관을 시염으로 하였다. 시염성(鼓鹽城)은 현재의 [[황해도]] [[연안군|연안]]이므로 이무가 식읍으로 받은 곳이 [[황해도]] [[연안군|연안]]으로 보는 것이 옳다. 또한 1821년에 연안 이씨 종원 이문우(李文愚)가 시조묘를 찾기 위해 여러 수소문을 한 결과 [[황해도]] [[연안군|연안부]] 서편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(隱逸洞)에서 시조묘를 찾고, 혼유석과 상석 밑에서 ‘연안백이무(延安伯李茂)’라고 쓰여 있는 지석을 발견하였으므로 이무가 식읍으로 받은 곳은 [[중국]]과 무관한 [[황해도]] [[연안군|연안]]임이 자명하다. [[https://n.news.naver.com/article/003/0006038492|#]] 1,000호의 식읍은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, [[중국]]의 만호후 수준의 제후였다. 당시의 식읍은 [[고려 시대]]와 달리 전적인 권한이 있었을 걸로 보인다. 역사적으로 볼 때 이무는 [[신라]]의 왕의 아랫사람은 아니며, 봉건시대 군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